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미 전쟁 (문단 편집) === 헨리 6세의 성인기 (1436) === 헨리 6세는 선량한 인물이었으나 외할아버지인 샤를 6세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의 징후가 있었다. 폭력적이지는 않으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섭정들이나 가족 등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보호자의 의견에 그대로 따랐다. 이는 미성년 시기에는 겸허하고 공정하게 신하들의 조언을 경청하는 평화적인 성군(rex pacificus)의 자질로 포장될 수 있었으나 섭정 기간이 끝나고 1440년대에 이르자 그가 나라를 통치하기는커녕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할 능력도 없다는 것은 이제 왕국 전체에 숨길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점점 야심을 드러내게 된 인물이 바로 장미 전쟁을 일으킨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였다.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는 헨리 6세의 친척으로, 제1대 요크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4남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친손자였다. 헨리 6세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헨리 6세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의 아버지인 케임브릿지 백작 리처드는 헨리 5세에게 반역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제3대 요크 공작의 백부인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고, 헨리 5세는 자신의 능력과 건강에 자신이 있었으며, 후계자 리처드가 고작 4세였기에 반역자의 아들인 리처드에게 요크 공작령을 물려주는 선심을 썼다. 하지만 헨리 5세가 요절한 결과 강력한 왕위 경쟁자에게 힘을 실어준 꼴이 되어버렸다. 리처드는 이후 모계로 모티머 가문의 막대한 웨일스 변경 영지까지 물려받아 왕국 최대의 귀족 중 하나가 되었다. 서머싯 공작 등 헨리 6세의 조언자들은 리처드를 경계했고, 중앙정부의 요직이 아닌 아일랜드 총독직 등 한직으로 그를 몰아냈다. 당연하게도 요크 공작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서머싯 등이 왕을 등에 업고 부패하고 무능하다며 공격했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백년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의 사령관이었는데, 전쟁의 패배 원인을 자신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헨리 6세의 측근들에게 돌렸다. 1453년 헨리 6세가 정신병으로 통치 불가 상태가 되었을 때는 요크 공작이 [[호국경]]을 맡아 헨리 6세 및 왕비의 측근들(대표적으로 서머싯 공작 보포트 가문)을 내치기도 했다. 하지만 1455년 1월 헨리 6세가 정신을 차리고 요크 공작 리처드의 결정을 모두 되돌리며 요크 공작을 호국경에서 파면하고 서머셋 공작을 복귀시켰다. [[에드워드 2세]]나 리처드 2세의 선례처럼 잉글랜드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land)의 '선한 법'을 준수하겠다는 대관식 맹세를 어기고 자의로 권력을 행사하는 [[폭군]]은 왕국 공동체의 보호와 그밖에 여러 명분을 붙여서 폐위될 수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자신이 선택한 소수의 측근들의 말만 듣지도 않았고 자기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나이들거나 병들어서 통치 능력을 상실한 왕이 폐위당한 전례는 없는데다 헨리는 그저 비정상적으로 우유부단할 뿐 멀쩡하게 걷고 말할 수 있으며 외할아버지처럼 이유 없이 사람을 찔러 죽이지도 않는 등 심신상실 상태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건강할 때는 섭정을 두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잉글랜드 중앙 정부를 하나의 파벌이 장악하거나 적어도 파벌 간의 타협이 이루어진다면 현명한 비공식 섭정들이 그나마 말은 잘 듣는 착한 왕을 조종해서 모든 문제가 당장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때문에 잉글랜드의 귀족들과 유력자들은 폭군도 아니고 단지 멍청해 보인다는 의심만으로 왕을 폐위시킨다는,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지주권을 보증하는 보통법 제도를 보증하는 왕권의 신성성을 돌이킬 수 없이 훼손할지도 모를 전례 없는 정치적 실험에 합의하기보다는 왕을 보좌하겠다고 나선 정치 파벌들의 동향을 불안하게 주시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히려 독이었다. 요크 공작이든 서머싯 공작이든 [[앙주의 마거릿|마가렛 왕비]]든 모두 포기나 타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요크 공작이 왕세자 에드워드를 사생아로 몰며 왕의 후계자 자리를 계속 노리는 이상 타협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국왕이 한쪽 파벌에만 힘을 실어주지도, 파벌들을 중재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요크 가문과 헨리 6세의 중신 및 왕비 간에 갈등의 골이 한없이 깊어지자 요크 가문은 '우리도 한번 뒤집어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뒤집고 랭커스터 왕조를 연 것처럼 우리도 못 할 게 뭐냐"는 생각에 따라 요크의 리처드는 자신이 단순히 헨리 6세의 후계자일 뿐만 아니라 플랜태저넷 왕조의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 주장은 그의 아들 [[에드워드 4세|마치의 에드워드]]에게 계승되었다. 이 논리에도 명분은 있었는데, 헨리 4세의 왕위를 부정하고, 에드먼드 모티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보면 되었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자녀없이 죽었고, 남자 형제가 없었다. 즉 에드먼드 모티머가 사망하면 그의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 형제 또는 그 장남이 왕위 계승자였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큰누나인 앤 모티머는 제3대 요크 공작인 리처드의 어머니였다. 따라서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4세와 그의 후손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자신이 앤 모티머의 아들임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참고로 앤 모티머와 케임브릿지 백작 리처드는 6촌 친척이었다. 앤 모티머는 친척 할아버지뻘에게 시집간 셈이다. 실제 나이 차이는 많이 안 나서 리처드가 15세가량 연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